소진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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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진은 전국 시대 낙양 출신의 종횡가로, 합종책을 주장하여 진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그는 귀곡자에게 학문을 배우고, 연, 조, 한, 위, 제, 초 여섯 나라를 설득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합종 동맹을 결성하여 재상을 겸임했다. 하지만 동맹이 와해된 후 제나라에서 암살당했다. 사기 기록과 마왕퇴에서 발견된 비단 문서의 내용이 달라 소진의 생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만화 킹덤 등에서 그의 전략이 언급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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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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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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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소 (蘇, Su) |
이름 | 진 (秦, Qín) |
자 | 계자 (季子, Jìzǐ) |
작위 | 무신군 (武信君, Wǔxìn Jūn) |
출생 | 기원전 382년 (추정) |
사망 | 기원전 284년 (추정) |
활동 시기 | 전국시대 |
출신지 | 낙양 (雒陽, Luòyáng) 동쪽 |
직업 및 역할 | |
직업 | 유세가, 외교관, 정치가, 전략가 |
주요 활동 | 합종책 주창 |
상세 정보 | |
주요 업적 | 6국 합종책 성사 |
섬긴 국가 | 주나라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
관련 인물 | 형: 소대 스승: 귀곡자 정적: 장희 |
기타 | 전국책 기록 사기 열전 수록 |
일화 | |
주요 일화 | 현량자고 전거후공 |
2. 어린 시절 및 수학
낙양에서 태어나 제나라 귀곡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는 것이 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合縱|합종중국어은 가장 강력한 진나라를 막기 위해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소진의 전략이었다. 소진은 연나라 문후(文侯)에게 "연나라는 멀리 있는 진나라와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 먼저 가까이에 있는 이웃인 조나라와 친해져야 합니다. ... 조나라와 합종하십시오. 천하와 하나가 되면 연나라는 우환이 없게 될 것입니다"[1]라고 설득했다. 문후는 소진의 말을 칭찬하며 조나라와의 동맹을 맺도록 했다.
6국 연합은 각 회원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 기반이 얕았다. 진나라가 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상대로 징벌적 원정을 감행하면서 6국 연합은 종말을 맞이했다. 소진은 조나라를 떠났고, 동맹은 와해되었다.[5]
1973년, 창사 마왕퇴에서 전국 시대 "종횡가(縱橫家)의 기록"이라 불리는 비단 문서들이 대거 발굴되었다. 이 문서는 총 2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4개 장에는 소진의 서신과 대화가 담겨 있다. 이는 "전국책"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사기"에 기록된 소진 전기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6]
킹덤 (만화)에서 이목은 소진의 연합 전략을 사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소집했지만, 제나라가 거부하여 연합군은 진나라 군대에 패배하고 일부 지휘관이 전사했다.[1] 이후 연합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제나라 영토를 공격하다 와해되었다.[1]
소진은 낙양 출신으로, 제나라 귀곡자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는 기록이 사기에 전해진다.[1] 『자치통감』에 따르면, 소진은 하산 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고향에서 1년간 병법과 독심술을 공부한 뒤 주나라 현왕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고, 진나라에서는 상앙 처형 직후 유세객을 싫어하는 분위기 때문에, 조나라에서는 재상 봉양군 때문에 환영받지 못했다.[1]
[1]
서적
史记·苏秦列传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3. 합종책(合縱策)의 제안과 실현
당시 조나라는 소진을 미워하던 재상이 죽은 직후라 소진은 조나라 왕 숙후를 만날 수 있었다. 소진은 "지금 천하의 형세를 살펴보면 한나라,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 여섯 나라의 영토는 진나라의 다섯 배나 되고 ...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서쪽의 진나라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1]라며 조나라 왕을 설득했다. 조나라 왕은 기꺼이 동의하며 다른 제후들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
소진은 한나라 선왕에게 "천하의 강한 활과 좋은 칼은 모두 한나라에서 생산되며 ... 이처럼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현명한 대왕께서 진나라에 굴복하신다면 이야말로 천하의 웃음거리입니다."[1]라고 설득하여 합종에 참여시켰다.
위나라 양왕에게는 "위나라는 천하의 강국이고, 대왕은 천하의 현명한 임금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에 투항해 스스로 진나라의 속국이시라고 한다면, 이는 치욕입니다."[1]라고 설득하여 합종에 참여시켰다.
제나라 선왕에게는 "제나라는 ...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지금 대왕께서 서쪽을 바라보며 진나라를 받들려고 하니 신은 가만히 대왕을 위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1]라고 설득하여 합종을 성사시켰다.
마지막으로 초나라 위왕에게는 "진나라는 ... 천하의 원수입니다. ... 합종하게 되면 모든 나라가 초나라를 섬길 것이고, 연횡하면 초나라는 진나라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1]라고 설득하여 합종에 참여시켰다.
이렇게 여섯 나라는 합종을 이루고 굳게 단결하였으며, 소진은 합종의 책임자가 되었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였다. 조나라로 돌아간 소진에게 숙후는 무안군(武安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여섯 나라의 합종 이후 진나라는 15년 동안 함곡관 밖으로 군대를 보내지 못했다.[1]
4. 합종책의 와해와 소진의 죽음
제나라는 연나라를 이용하여 새로운 군주인 역왕을 옹립했고, 위나라 왕이 소진에게 되찾아 달라고 요청한 10개 도시를 점령했다. 소진은 제나라 왕에게 "연나라 왕은 제나라의 친족이며, 그의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이는 필시 진나라의 정예 병력을 불러올 것이니, 이 도시들을 돌려주셔야 합니다!"라고 청원했다.[5]
연나라 문후가 죽은 후, 역왕이 왕위에 올랐다. 소진은 고(故) 문후의 미망인과 불륜 관계를 맺었고, 역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처벌을 두려워 연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서 선왕으로부터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선왕이 죽자, 민왕이 왕위에 올랐고 소진은 군주의 총애를 얻기 위해 대신들과 경쟁했다. 대신들은 소진을 암살하려 했고,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제나라 왕은 범인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소진은 임종 직전에 왕에게 암살범을 체포할 계획을 제시했다. 그가 죽은 후, 소진은 사후에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그의 시신은 마을 광장에서 사지가 찢겨졌다. 이로 인해 소진의 암살범들은 스스로를 드러냈고, 그들은 결국 처형되었다. 그 후 소진의 첩자들은 제나라에 정보를 유출하여 연나라의 추가적인 증오와 분노를 유발했다.[5]
합종이 해체된 후 소진은 연나라를 섬겼지만, 국내에서의 입장이 미묘해져 제나라로 옮겨갔다. 그 목적은 제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연나라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제나라에서는 민왕에게 등용되었지만, 그 때문에 대립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소진은 죽기 직전에 민왕에게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을 거열형에 처하고, '소진은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에서 모반을 꾀했다'라고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나를 죽인 자가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민왕은 소진의 유언에 따라 소진을 죽인 자가 자수해오자 붙잡아 처형했다.[5]
5. 『사기(史記)』 기록의 모순과 새로운 연구
이 문헌에 따르면, 소진은 장 의 이후 연나라 소왕 시대에 활동했으며, 공손연과 함께 희수의 연횡에 맞서 장의의 상호 대립을 이어갔다. 소진은 스승 유기에게서 종횡가의 모든 것을 배웠고, 유기의 서고에서 "음부의 책략"을 발견하여 수년간 연구해 통치자의 지지를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연 소왕 즉위 후, 소진은 주나라를 떠나 연나라로 가서 제나라 선왕에게서 빼앗긴 10개 성을 반환받는 공을 세웠다. 기원전 294년(제 민왕 7년), 소진은 제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맹상군과 친분을 쌓았다.
기원전 292년, 소진은 제, 조, 진 세 나라가 송나라 영토를 두고 다투는 상황에서 연 소왕에게 비밀 회담 내용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며 계책을 제안했다. 이후 소진은 제나라와 조나라 사이를 이간질하여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약화되도록 만들었다. 결국 제나라는 다른 다섯 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고, 악의가 제나라를 격파하자 제 민왕은 소진을 처형했다.
1972년 산둥성 임기현 은작산 1호 묘에서 발굴된 손자병법 대나무 간에는 "연나라가 번성했을 때, 소진이 제나라에 있었다"라는 문구가 있어, 소진이 전국 시대 말기에 활동했음을 뒷받침한다.
『사기』 소진열전에는 소진이 낙양 출신으로 귀곡자에게서 종횡의 술을 배우고, 여러 나라를 방랑하다 귀향하여 친척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후,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진은 주나라 신정왕, 진나라 무왕에게 접근했으나 실패하고, 연나라 소왕에게 진언하여 조나라와의 동맹을 성립시켰다. 나아가 한나라,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를 설득하여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동맹을 맺고 재상을 겸임했다. 이때 한나라 양왕에게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가 되지 말라"[5]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한 시기는 소진보다 200년 이상 뒤였고, 진 시황제의 분서갱유로 인해 자료가 부족했다. 특히 동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소진의 업적에 대한 사실 관계가 모호해졌다. 사마천 자신도 "세상에서는 소진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가 많고, 다른 시대의 사건을 모두 소진의 업적에 부회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1973년 후난성 창사시 마왕퇴 한묘에서 발견된 『전국종횡가서』는 소진의 업적을 대폭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소진은 장의보다 늦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제나라와 연나라 사이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합종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연나라를 위해 제나라와 조나라를 이간질했다. 그 결과, 기원전 288년 5개국 연합군이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기원전 284년에는 연, 조, 위, 한, 초 5개국이 합종하여 제나라를 공격(제서의 전투)하여 연나라가 복수에 성공했다.
6. 평가 및 현대적 의의
회남자 詮言훈(詮言訓)에서는 "공손룡(公孫龍)은 말재주가 뛰어나 명칭을 바꾸고, 등석(鄧析)은 궤변으로 법을 어지럽히며, 소진(蘇秦)은 웅변에 능하여 나라를 망쳤다"라고 하여, 그 지모(변론술)가 도리어 나라를 망하게 한 예로 비판받고 있다.[2]
7. 기타
결국 연나라로 가서 문후를 만나 합종책을 주장했다.[1] 연나라가 진나라와 가까이하는 것보다 조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설득하여, 조나라와의 동맹을 맺게 했다.[1] 당시 조나라는 소진을 싫어하던 봉양군이 죽은 직후라 숙후를 만날 수 있었다.[1] 소진은 조나라 왕에게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나라 왕은 이에 동의하며 소진에게 다른 제후들을 설득할 임무를 맡겼다.[1]
소진은 한나라 선왕에게 진나라에 굴복하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고,[1] 위나라 양왕에게는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은 치욕이며 간신들의 말에 따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1] 제나라 선왕에게는 제나라의 강성함을 들어 진나라를 섬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설득했다.[1] 마지막으로 초나라 위왕에게는 진나라가 천하의 원수이며 합종만이 초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여 합종에 참여시켰다.[1]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을 맺었고, 소진은 합종의 책임자이자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1] 조나라로 돌아간 소진에게 숙후는 무안군 칭호를 내렸다.[1] 여섯 나라의 합종 이후 진나라는 15년 동안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1]
참조
[2]
서적
战国纵横家书
Records of the Vertical and Horizontal Alliance Schools of Thought
[3]
문서
[4]
서적
吴孙子发微
中华书局
1997-06-01
[5]
문서
高等学校国語総合/漢文/鶏口牛後
[6]
간행물
合従連衡と蘇秦の正体
학연
199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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